
현대자동차를 세계 5위의 자동차 회사로 일군 정몽구 명예회장이 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선다. 1998년 현대차 회장에 오른 지 23년 만이다. 정 명예회장은 지난해 현대차 사내이사에서 물러난데 이어 다음달 마지막 남은 현대모비스 등기이사직마저 사임할 예정이다.
정 명예회장은 2019년 3월 현대모비스 임시 이사회에서 대표이사에 재선임돼 2022년 3월 21일까지 임기가 남아 있다. 대신 현대모비스는 정 명예회장의 사내 등기이사 자리에 고영석 연구개발(R&D) 기획운영실장(상무)을 추천했다. 상무급 임원을 사내이사로 추천한 건 현대모비스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직급보다 전문성을 고려해 이사회를 구성하겠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현대모비스는 지난 18일 공시를 통해 “고영석 상무와 김대수 고려대 교수, 조성환 사장, 배형근 부사장 등 4인에 대한 이사선임 안건을 정기 주총에 상정한다”고 밝혔다.
앞서 현대차 이사회는 지난해 2월 정 명예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 안건을 상정하지 않기로 해 3세 경영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같은 해 3월에는 현대차 이사회에서 21년 만에 이사회 의장직이 정의선 당시 그룹 수석부회장에게 넘어갔다. 이후 정 명예회장은 현대차 미등기임원과 현대모비스 등기이사직만 유지했으며, 10월 그룹 회장직을 정 수석부회장에게 넘겼다.
또한 현대모비스 대표이사직에서도 물러났다. 정 명예회장은 앞서 2014년 현대제철 이사직에서, 2018년에는 현대건설 이사직을 각각 사임했다.
세계 5위로 이끈 승부사
1938년생인 정 명예회장은 세계 5위의 자동차 그룹을 일군 '승부사'로, 1998년 현대차 회장에 이어 1999년 3월 이사회 의장에까지 오르며 그룹 경영을 주도했다. 이듬해인 2000년에는 동생인 고(故)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과 '적통' 자리를 두고 '왕자의 난'을 벌인 끝에 현대차 계열 회사만 들고나와 '홀로서기'를 했다. 당시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로 부도에 빠진 기아(당시 기아자동차), 현대건설 등을 인수해 본격적인 그룹 외형을 확장했다.
현대차그룹은 2000년 당시 재계 서열 5위에 그쳤지만, 2007년 2위에 오른 뒤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정 명예회장은 차량 디자인과 품질 개선은 물론, 고급브랜드 ‘제네시스’ 론칭 등 지속적인 투자 확대를 통한 개발 역량 고도화를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 7월 대장 게실염으로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하면서 한때 건강 이상설이 돌았지만, 입원 4개월만인 11월에 퇴원하며 건재함을 알렸다.
업계에서는 정 명예회장이 사실상 퇴진을 결정한 것에 대해 건강상 문제를 고려했다고 본다. 정 명예회장은 지난해 7월 대장게실염 진단을 받고 서울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서 4개월가량 입원 치료를 받았다. 당시 정 명예회장이 평소 치료받던 서울성모병원이 아닌 아산병원에 입원하며 일각에서는 건강 위독설이 나오기도 했다. 다행히 증세는 호전됐고 정 명예회장은 지난해 11월 말 한남동 자택으로 귀가했다. 다만 정 명예회장이 올해 여든 넷의 고령인 점을 고려할 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그룹에서의 본인 역할을 빠르게 정리하려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기에 아들인 정 회장이 지난해 10월 그룹 수장에 오른 후 내연기관 중심인 현대차그룹을 발 빠르게 미래 모빌리티 기업으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고 현대모비스 등기이사직 조기 퇴진 결심을 굳혔다는 시각도 있다.
정 명예회장이 현대모비스에서 물러나며 현대차그룹의 정의선 체제는 보다 공고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정 회장은 지난해 10월 그룹 수장에 오른 뒤 4개월 동안 광폭 행보를 보였다. 2019년 정 회장은 수석부회장 당시 직원들과 타운홀미팅을 갖고 그룹의 미래 방향성으로 ‘자동차 50%, 도심항공모빌리티(UAM) 30%, 로보틱스 20%’를 제시했다. 지난 4개월 간 정 회장은 이 청사진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착실히 밟아왔다.